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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스탈린/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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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과 장례식 == [youtube(s3I-dnTEgDU)] 스탈린은 말년에 관저보다 [[모스크바]] 서부, [[흑해]] 연안 별장들에서 주로 생활했고[* 흑해 연안에 스탈린의 별장이 다수 있으나 사망한 곳인 [[https://www.wsj.com/articles/russia-hedges-over-stalins-legacy-1431077407|죽음의 미로가 있는 별장]]은 모스크바 서쪽 외곽에 떨어져 있는 별장이다.] 그곳에서 편지를 통해 지시를 내렸다. 이 별장에는 당구장, 영화관이 설치되어 있었고 인민들은 상상할 수 없는 풍부한 요리와 술, 그리고 담배가 준비되었다. 스탈린은 마음 내키는 사람들과 더불어 이곳에서 지냈다. 물론 그들은 대개 스탈린의 충실한 종이었다. 1953년 2월 28일 저녁, 스탈린은 [[게오르기 말렌코프]], [[라브렌티 베리야]], [[니콜라이 불가닌]], [[니키타 흐루쇼프]]를 호출하여 여느 때처럼 같이 영화를 보자고 했다. 영화를 본 스탈린은 측근 4인방을 데리고 그의 별장인 블리즈나야로 데려가 연회에 초대했다. 베리야를 포함한 고위 당원들은 콧수염 대마왕의 피바람을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연회가 가시방석 같았겠지만 그렇다고 참석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실제로 스탈린은 연회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몇몇 사람들을 숙청했기 때문이다. 만찬은 다음 날인 3월 1일 오전 4시에 이르러서야 끝났다. 스탈린을 비롯한 참석자들은 모두 심각하게 취한 상태였다. 스탈린은 이날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고, 열정적으로 손을 흔들면서 참석자들을 배웅하고 농담을 늘어놓으며 참석자들을 애칭으로 불렀다. 스탈린이 이렇게 기분 좋게 그들을 배웅하는 일은 언제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흐루쇼프 등도 기분 좋게 귀가했다. 측근들이 돌아가자 스탈린은 경호원들에게 자신이 부를 때까지 방해하지 말라고 말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3월 1일 아침에 경호원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매일 아침 10시마다 경호원들을 불러 보고를 받던 스탈린이 아무리 기다려도 방에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경호원들은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스탈린의 명령을 거역할 경우 자칫 큰 [[숙청|재앙]]을 부를 수도 있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좌불안석이 되어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러다가 오후 6시 반에 별장 안에 불이 켜지자 경호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방에서 아무런 명령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경호원들은 누군가는 들어가 봐야 한다고 싸웠지만 아무도 감히 스탈린을 방해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후 오후 10시쯤 모스크바 중앙위원회 사무실에서 스탈린에게 온 소포가 도착하자 경호원들은 오후 11시에 이 소포를 빌미로 하여 방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이때 파벨 로즈가쇼프, 혹은 미하일 스타로스틴은 별장에 들어가 식당에 불을 켰다가 스탈린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기절할 뻔했다. 스탈린은 의식은 있었지만 말은 못하는 상태였고, 손을 심하게 떨고 소변을 잔뜩 흘린 상태였다. 스탈린은 손을 흔들며 도움을 요청했고, 그래서 나머지 경호원들이 몰려와 스탈린을 소파에 눕히고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들은 누구도 스탈린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고, 또 명령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로봇 같은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스탈린이 위급한 상황일 때 오히려 아무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거기에 의료진을 모조리 감옥에 가둔 상태라 의사도 곁에 없었다. 결국 스탈린은 자신이 뿌린 행동 때문에 자멸해 버린 [[자승자박]]의 전형적인 예시가 되어버렸다. 경호원들은 먼저 국가보안부 장관 세묜 이그나티예프에게 연락했고, 이그나티예프는 베리야와 말렌코프를 부르라고 했다. 베리야는 연락이 닿지 않았고 말렌코프와 겨우 연락이 닿을 수 있었는데, 말렌코프는 베리야, 흐루쇼프, 불가닌을 모두 불러서 다 같이 별장으로 갔다. 말렌코프가 혼자서 스탈린의 별장에 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경호원들로부터 스탈린이 오줌을 흘리며 쓰러져 있다는 말을 듣고 경악한 측근들은 베리야와 말렌코프를 보내 조심스럽게 스탈린의 상태를 살폈다. 스탈린이 깰까 봐 말렌코프는 구두를 벗고 양말 바람으로 스탈린에게 다가가 그가 코를 골고 있는 걸 확인했다.[* 정말 코를 골고 있었다기보다는 스탈린이 깰까 봐 두려워 불도 켜지 못한 상황에서 들어가 제대로 보지도 못했을 상황이었기에 의학적인 지식이 부족한 측근들이 체인-스톡스 호흡(호흡 이상)을 코고는 소리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스탈린의 관저에서 나온 베리야는 스탈린은 그저 잘 뿐인데 법석을 떨었다고 경호원들에게 각오하라고 질책을 했다. 경호원들은 몇 시간 전에는 사태가 더 위중했다고 해명을 시도했지만 측근들은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스탈린과 별장에 남은 경호원들은 스탈린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호소했다. 이에 측근들은 마침내 당 중앙위원회 상임위원회 사무국을 소집해서 의사들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의사들은 진료했을 때 곧 스탈린의 상태가 돌이킬 수 없음을 알았다. 오른쪽 팔다리는 마비되었고, 피를 토했으며, 체인-스톡스 호흡(Cheyne-Stokes respiration)이라는 불규칙한 호흡[* 호흡이 점차 깊어지다가(동시에 더 빨라지는 경우도 있다) 다시 천천히 호흡이 얕아지고(호흡이 점차 빨라지던 경우엔 이때 속도 역시 감소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무호흡 상태가 잠시간 지속되고, 그 이후 다시 한 사이클이 반복된다. 간격은 약 30초에서 2분. 그리고 이러한 호흡을 보이는 경우, 사실상 죽음에 매우 가까워지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을 했다. 스탈린의 사망 원인은 뇌출혈이나 뇌경색일 가능성이 높아보이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이유에서인지 스탈린의 부검 결과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스탈린의 죽음과 관련된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것은 스탈린이 살아나면 곤란한 베리야를 비롯한 고위 당간부들이 그를 독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기밀 문서가 해금되면서 이런 음모론은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예를 들어 2011년 소련의 비밀 문서가 공개되었는데 스탈린의 사인은 확실하게 뇌출혈이라고 판명이 났다. 스탈린의 측근들이 스탈린이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음모론도 그들의 당시 행동의 맥락을 고려해본다면 설득력 없는 음모론에 불과하다. 아무튼 당 지도부는 스탈린의 상태를 정확히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들은 사악한 배신자로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던 전문의들을 찾아갔다. 의사들은 자신들을 고문하고 심문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공손하게 돌변한 데에 굉장히 놀랐다. 당 지도부는 그들에게 체인-스톡스 호흡을 한다는 환자가 어떻게 되는지 질문했고, 의사들은 사망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결과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당 지도부원들은 용기를 얻을 수 있었고, 기다렸다는 듯이 포스트 스탈린 시대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몰로토프는 한때 스탈린의 후계자로 생각되었으나 그는 스탈린의 공격을 받은 상태로 실권을 빼앗긴 상태였기 때문에 최고 권력을 얻겠다고 주장할 수 없었다. 스탈린은 [[2인자]] 따위는 키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제 새로운 권력 투쟁이 시작되었다. 한편 스탈린의 정치국원들은 3월 4일에서 3월 5일로 넘어가는 심야에 당중앙위원회 간부회 사무국 회의를 소집하여 사무국을 폐지하고 19차 당대회 이전의 정치국처럼 작은 규모로 간부회를 축소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 5일, 당중앙위원회, 소련 장관회의,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연합회의가 개최되어 스탈린을 건강상의 이유로 수상에서 해임하고 말렌코프를 수상으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몰로토프, 베리야, 불가닌, 카가노비치를 제1부수상에 임명하고 내무부와 국가보안부를 통합하여 베리야를 장관에 임명하였다. 스탈린은 혼수상태에서 그렇게 권좌에서 물러났는데, 그가 죽기 70분 전의 일이었다. 결국 적기를 놓친 상태에서 무의미한 치료가 계속되다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3번을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음악으로 들은 뒤[* 스탈린은 모차르트의 음악을 매우 좋아했고 특히 피아노 협주곡 23번을 매우 좋아했으며, 특히 [[https://youtu.be/YGZoKplBhfo|마리야 유디나가 연주한 버전]]을 선호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건 유디나는 스탈린을 매우 경멸했다고.[[https://www.mk.co.kr/opinion/columnists/view/2015/11/1088517/|#]]] 스탈린은 1953년 3월 5일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발표된 그의 공식적인 사인은 '고혈압의 발작에 의한 뇌의 대출혈'. 말년의 스탈린은 이중 삼중으로 경비를 세웠고, 항상 자신이 자는 방을 수시로 바꿀 정도로 암살이나 테러를 두려워했다. 특히 의심병에 빠져 위급 시에 자신을 돌봐줄 의사들을 숙청하는 바람에 정작 중요한 순간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수많은 인민들과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며 공포 정치를 휘두르던 강철의 사나이 스탈린도 공포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한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파일:external/media2.wnyc.org/stalin_funeral.jpg|width=560]] [[파일:external/pds22.egloos.com/a0048039_4d968822ad59e.jpg|width=560]] [[파일:external/pds19.egloos.com/a0048039_4d968de25e10d.jpg|width=560]] [[파일:external/seanmunger.files.wordpress.com/zombie-stalin.jpg|width=560]] 1953년 3월 6일 아침, 소련 인민들은 다음 소식을 접하게 된다. >"[[블라디미르 레닌|레닌]]의 가장 가까운 동료요. 그의 계승자였으며, [[공산당]]과 소련 인민의 현명한 지도자이자 교사로서 우리 곁에 있던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의 심장이 박동을 멈추었다!" 그의 죽음이 발표되자 소련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오랜 숭배 의식으로 이미 신격화가 철저히 진행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죽자 수많은 인민들이 대성통곡을 했고 공황 상태에 빠질 정도였다. 몇 년 간 그가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혀 들은 적이 없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소련 각지에서 그를 숭배하던 국민들이 몰려들었다.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들은 모두 만원이었고, 경찰의 통제가 필요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다. 스탈린은 그의 스승이라고 알려진 레닌과 비슷한 방식으로 장례를 치를 계획이었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처럼 방부 처리가 된 시신은 유리관 속에 넣어져 [[레닌 영묘]]에 함께 안장될 예정이었다. 독재자가 현직에서 죽으면 대체로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파일:external/globetrotterblogdotnet.files.wordpress.com/image69.jpg|width=70%]] 사후 시신은 방부처리되어 [[붉은 광장]]에 있는 [[레닌 영묘]]에 합장되었다. 레닌과 같이 스탈린도 잠자는 듯한 모습으로 방문객이 관람할 수 있었고 당시 영묘 입구에도 레닌과 스탈린의 이름이 동시에 쓰여있었다. 그러다가 후에 스탈린 격하 운동 이후 1961년에 다시 [[화장(장례)|화장]]되어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파일:5d5e43b785600a246244d236.jpg]] 이마저도 초기에는 지금보다 훨씬 초라한 모습이었으나, 1970년대 브레즈네프 시대에 들어서면서 스탈린에 대한 재평가가 어느 정도 이루어 지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히더 프링글의 저서 <미라>에 따르면 엠버밍을 주도한 이는 세르게이 데보프(Сергей Сергеевич Дебов, 1919~1995)[* 그는 1969년에 사망한 호찌민의 시신도 방부처리했다.]였는데, 그는 곰보 자국까지 없애가며 방부처리를 했다고 한다. 스탈린의 관 옆에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고 외치는 휘장이 쳐졌다. 스탈린은 죽음에 이르러서도 자신의 특기를 끝까지 발휘했다. 3월 8일 그의 시신을 보려는 인파가 너무 많이 몰려서 수백명이 깔려 죽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었다. 이 참사는 [[니콜라이 2세]]의 즉위식 당시 벌어진 [[호딘카의 비극]]과도 같다고 여겨졌고, 스탈린의 장례식에서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소련 체제에 타격을 줄 것을 우려한 소련 지도부가 은폐하기로 결정하면서 제대로 조사되지 않았다. 로버트 서비스는 스탈린이 죽어서까지 죽음을 부르는 능력을 잃지 않았다고 촌평했고 올레크 흘레브뉴크는 이 참사가 외국의 사주로 일어난 것이라는 음모론이 나타난 것을 지적하며 스탈린이 인민들을 잘 교육시켜 놨다고 촌평했다. 스탈린의 죽음에 대해서 많은 인민들이 그의 죽음을 정말로 슬퍼했지만 노골적인 증오와 적의를 드러내는 사람도 있었다. 이 때문에 국가보안부는 스탈린에 대해 불경한 발언을 한 인민들을 체포하여 처벌했다. 여담으로 스탈린과 바로 같은 날에 소련의 대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가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스탈린의 죽음에 그대로 묻혀 버렸는데, 스탈린의 죽음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조화를 사가는 바람에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장례식에는 쓸 수 있는 조화가 단 한개도 없었다는 것. 결국 프로코피예프는 조화 없이 지하실에서 초라한 장례식을 치렀다. 이듬해 '해빙'을 발표하게 되는 작가 [[일리야 에렌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분개하였다. "모든 인류가 우리의 스승이자 지도자인 세기의 천재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의 대체불가한 죽음을 애도하고 있을 때, 권력기구는 [[프로코피예프|또다른 위대한 러시아인]]의 죽음이 대중의 이목을 끄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1953년 3월 9일, 스탈린의 장례식이 끝났다. 이제 레닌-스탈린 영묘로 이름을 바꾼 레닌 영묘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은 영원히 잠들었다. 자유 진영의 거두 미국, 영국을 포함해 전세계에서 고위급의 인사로 구성된 조문단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세계의 언론들은 스탈린의 죽음을 알리며 그를 위대한 지도자로도,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사악한 독재자로도 평가했지만, 그가 농업국가 러시아를 원자력 소련으로 현대화했으며 세계를 양분하는 초강대국의 지도자이자, 무엇보다도 [[아돌프 히틀러]]에 맞서 싸운 최고사령관 중 하나였다는 것에 경의를 표했다. 많은 인민들이 흐느껴 울면서 스탈린이 없는 소비에트 연방의 미래를 걱정하였다. 소설가 [[미하일 숄로호프]]는 이렇게 애도하였다. >잘 가시오! 아버지! > >뜻밖에 고아가 되어 버린 슬픔을 지울 수 없나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스탈린의 이름은 차츰 신문에서 사라져갔다. 그의 후계자들도 스탈린의 이름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4월 4일, [[프라우다#s-1.1]]지는 의사들의 음모가 사실무근임이 밝혀졌다고 발표하였다. 1956년, [[니키타 흐루쇼프]]는 공산당 제20차 전당 대회에서 스탈린의 잘못을 낱낱이 고발하는 장시간의 연설을 하였다. 1961년 10월의 제22차 전당대회에서는 더욱 더 통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흐루쇼프에 이어 연단에 오른 고참 볼셰비키 [[https://en.wikipedia.org/wiki/Dora_Lazurkina|도라 라주르키나]]는 자신의 꿈에 나타난 레닌의 영혼이 혼자 쉴 수 있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이제 레닌 묘에 함께 안치되어 있던 스탈린의 시체는 크렘린 벽 묘지로 이장되었다. 스탈린의 초상화와 기념품들도 차츰 사라졌다. 이렇게 [[독재자]]는 차츰 잊혀갔다.[* 스탈린의 과거를 생각한다면 강등이겠지만 이것도 엄청나게 큰 영예이다.] 스탈린의 통치 기간 소비에트 연방은 나무 쟁기밖에 없는 후진적인 농업 국가에서 [[핵무기]]를 보유한 세계의 초강대국이자 강력한 산업 국가로 변모했다. 그리고 그는 [[아돌프 히틀러]]와 벌인 세기의 대결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스탈린은 너무 많은 피를 손에 묻혔다. [[러시아 혁명|혁명]], [[대숙청]], [[대조국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소련 인민의 1/10이 희생되었다. 스탈린이 이뤄낸 위대한 업적이, 그 과정에서 강요된 희생을 모두 정당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후일, 시인 [[예브게니 옙투셴코]]는 스탈린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그의 무덤을 두겹,''' > >'''세겹으로 둘러싸라!''' > >'''그리하여''' > >'''그의 체취마저 새어 나오지 않도록,''' > >'''그의 과거가 영원히 잠들도록!'''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이오시프 스탈린, version=1338, uuid=691e5cba-6d6e-4616-a021-13f9b09e596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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